고통(苦痛), 한자로 ‘쓸 苦’자에 ‘아플 痛’ 자를 쓴다. 사전에는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단 한 줄로 씌여 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의됨에도 우리는 모두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고, 없애고자 하며,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역설적으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끝내기 위해서)죽음이라는 선택을 한다.
장미란 선수가 역기를 들어 올리기 적전의 모습을 보자. 그 얼굴은 고통에 휩싸인,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단 몇 초 뒤 그는 기쁨에 겨워 환하게 웃고 세상에서 최고가 된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삶을,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관점에서 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같은 질문을 통해 어떤 사람은 산을 찾기도, 또 다른 사람은 신을 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다른 감각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마음에 차오르는 벅찬 느낌, 공원 벤치에 앉아서 느끼는 봄 햇살의 따스함과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부드러움, 산길을 가다 코를 스쳐 가는 라일락과 아카시아 꽃향기,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느껴지는 신비함과 경외감, 내 아이를 품에 꼭 안았을 때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느낌,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났을 때 마음에서 올라오는 반가운 느낌.
만약 신이 나에게 이 모든 느낌을 가지기 위해 고통이라는 감각도 함께 가져야 한다고 하신다면 나는 고통도, 기쁨도 느낄 수 없는 무감각보다는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는 온전한 감각을 원할 것 같다.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지,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를 바라거나 아예 고통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또는 인간의 삶에 왜 고통이 존재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좀 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